[작은 교회의 축복-첫째] 이민교회의 90% 이상은 작은 교회들이민교회 90%이상 50명 전 후의 작은 교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뉴욕, 뉴저지 600여교회 가운데 50교회 정도를 제외하고는 목사님들의 사례비와 건물 렌트비와 관리비 정도를 충당하는데도 힘이든 교회재정으로 운영되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이민자들 대부분이 자녀교육을 중요시 하기 때문에 주일학교가 있는 교회를 찾다보니 교인수의 빈입빈 부입부는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부동산, 의사, 변호사, 보험업, 판매업 등은 고객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도 있기 때문에 교인수가 많은 중형규모 이상의 교회들로 모이게 됩니다.
본 사이트에 등장하는 문제가 되는 교회들은 작은 규모의 교회는 없습니다. 신앙이나 사상이나 교리적인 다툼이 아닌 내부적으로 너무 배가 불러서 다투는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만약 교회에 돈이 없었다면 과연 문제가 일어났을까 하는 내용들입니다.
물론 작은 규모의 교회들 속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목사님의 독재나 전횡도 있을 것이고, 수준문제도 있을지 모릅니다. 정말 생계유지를 위해서 목회하는 분들이 간혹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만나본 분들의 모습과 인격을 보면 대부분이 순수하며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작은 교회 규모의 목사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생활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생활고는 교인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모님들께서 목사님의 목회와 생활을 위해서 슈퍼우먼처럼 일해야 하는 것이 이민사회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작은 교회에 다니는 평신도들이 어떻게 보면 훨씬 교만하고 목사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교인 몇 십명 앉혀 놓고 설교하는 상황이 되다보니 자기들도 모르게 깔보는 교만함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크고, 화려하고, 일등스럽고, 잘나가게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는 간신처럼 머리를 숙이지만, 조그만 자기보다 못하게 보이거나 맞먹을 수 있다고 여기면 태도가 아주 거만해지고, 고개가 쳐드는 못된 성품이 있습니다. 아마 그러한 면에서 작은 교회에서 섬기는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의 가슴앓이는 대단할 것입니다.
어려운 교회사정 속에서 처음 이민을 온 이민자들을 식구처럼 대해주고 친형, 친동생처럼 섬겼는데 어느 정도 비지네스도 되고, 허리가 펴지고, 똥차도 팔고 이제 새차를 뽑을 정도의 상황이 되면, 영어권 자식교육이라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서 중형규모 이상의 교회로 하루 아침에 옮겨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러한 일로 상처받는 목사님들의 마음을 씻어줄 사람들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어디가서 하소연도 할 수 없습니다. 하소연하면 지도력이 없는 못난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 째째한 사람처럼 보여지기 때문에 그냥 가슴 앓이 하면서 수평이동해가는 교인들을 멍하니 쳐다 보아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곳에 거론되었던 중부교회, 새교회, 갈보리교회, 퀸즈한인교회, 하나임교회, 순복음뉴욕교회의 성도님들은 이제 그 자리에서 머물면서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구경꾼이 되지 마십시오. 사시는 동네에 있는 작은 교회로 찾아가 어렵지만 힘들고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과 함께 하는 것이 진정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고 동행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증거를 위해서 거리만 다니신것잉 아닌 예루살렘성전이나 회당을 출입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역하신 삶의 현장은 가난하고, 약하고, 힘들고, 병든 자들과 함께 하는 삶이었고, 그것이 바로 "섬김" 이라는 것임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배가 불러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때가 끼여 있습니다.
큰 교회 속에서 그럴듯한 설교, 그럴듯한 성가대, 그럴 듯한 주일학교 등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자기 만족 속에서 무엇인가 종교적인 안심을 가지고 일이 해결되었는양 생각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는 정말 순수해지지 아니하면, 정말 예수그리스도의 마마음을 품지않으면 견디기 힘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율법에 도사들은 따라다니면서 괴롭히지요, 율법을 모르는 상처투성이의 사람들은 무엇을 얻어 먹을까, 어떤 기적이라도 볼까하고서 따라다니는 그 속에서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섬긴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높은 자가 낮을 자를 섬긴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낮아지셔서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의 빈곤한 삶이었지만, 생명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을 한번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의 집에서도 식사를 하셨고, 때로는 손가락질 당하는 여자에게 물 한그릇 달라고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 바로 낮아짐과 멸시와 수치와 벌거벗김과 매맞음이라는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이었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길이었습니다.
끝까지 낮아짐으로 섬겨야 하는 작은 교회의 목사님들은 조금도 기가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이 땅에 오셔서 남긴 제자들은 배신한 가롯유다를 빼면 불과 11명이었으며, 전부 합쳐도 12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2명만의 제자를 키우는 작은 목회를 하면 어떻습니까?
평생을 모아도 120명밖에 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이민자들 가운데 가장 미천하게 보이는 그리스도인들 속에 누가 계십니까? 성령하나님이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습게 보이고, 연로하고, 아무 능력들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여도 그 속에 창조주 하나님이 내주하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아시는 목사님들이 섬겨야 하는 30명 정도의 교회는 적어도 돈 떄문에, 땅 때문에, 건물 때문에, 서로 다투는 수백명 수천명의 교회보다 훨씬 복되고 아름답습니다.
바울이 거대한 성전건축을 하기 위해서 헌금을 요구한 곳은 성경 어디를 보아도 없더군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접받고 영광받았던 어떤 곳도 없습니다. 전부 순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았지만, 세상적으로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적어도 바울의 삶을 설교할 수 있는 분들의 환경을 들라고 하면 이민교회의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들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이 글은 '아굴라'님께서
복음과 희망 싸이트에 올려 놓으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