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올 때를 알아야

김동욱 0 3,935 2007.05.22 23:46
나는 스포츠를 좋아 한다. 거의 모든 스포츠를 좋아 하지만, 유난히도 야구를 좋아 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때에는 한국에 프로 야구가 생기기 전이었다. 나중에 동대문 야구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이제는 철거당할 처지에 놓여 있는 ‘서울 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던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의 한일전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일보사의 초청으로 매년 여름이면 찾아 오곤 하던 재일교포 고교 야구 선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서브머린’을 선보였던 김기태 선수의 빼어난 피칭을 기억하고 있다. 고교 야구가 인기의 절정을 구가하던 시절, 종종 수업을 빼먹어 가며 야구장을 찾기도 했었다.

야구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선수는 투수일 것이다. 분석가들에 따라 조금은 다르게 말을 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차지하는 비율이 8할이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선발 투수가 상대팀 타자들의 공격을 잘 막아 준다면, 그 날의 경기는 잘 풀려 나가게 되고 어렵지 않게 승리를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선발 투수가 제구력에 난조를 보여 사사구를 계속하여 허용한다거나, 던지는 공에 위력이 없어 계속하여 안타를 허용한다면, 그 날의 경기는 패하게 된다.

투수가 난조를 보이는 경우에 해당 팀의 감독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투수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계속해서 던지게 할 것인가? 바꾸어야 한다면, 언제 교체하는 것이 적당할까? 전문가들은 ‘투수 교체는 한 템포 빠르게’라고 말한다. 잘 던지고 있을 때에, 한 명의 타자 정도는 더 상대해도 괜찮겠다고 느껴질 때에, 조금은 그 투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을 때에, 조금은 빠르다고 생각될 때에 교체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야구 경기에서의 투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스스로가 판단해서’ 마운드에서 내려올 수는 없다. 감독이 교체해 주지 않으면, 제구력에 난조를 보이건, 무수한 안타를 허용하며 난타를 당하건, 감독이 바꾸어 주지 않는 한 계속해서 던져야 한다. 갑자기 신체에 이상이 생겼다 해도 본인 스스로가 마운드에서 내려 서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몸에 이상이 있음을 감독에게 알린 다음에, 감독의 허락을 받아 마운드에서 내려 와야 한다.

야구 경기의 투수와는 달리, 우리 모두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설 수가 있다. 다니던 학교를 자퇴할 수도 있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둘 수도 있다. 태어나 자라 온 고국을 떠나올 수도 있고, 수 십년을 같이 살아 온 배우자에게서 떠나 갈 수도 있다. 누군가로부터 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으로 있던 자리들을 떠날 수가 있다.

우리는 ‘내려올 때’를 알아야 한다. 야구 경기의 투수는 감독이 내려올 때를 정해 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내려올 때를 정해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 스스로가 내려올 때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조직이나 단체의 지도자라면, 다른 어떤 것 보다도 내려올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신뢰를 잃어 버린 지도자들이, 구성원들로부터 존경심을 잃어 버린 지도자들이, 권모와 술수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대단히 추한 일에 속한다. 유권자들의 지지를 잃어 버린 정치가들,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학자들, 청중들의 감흥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연주자들,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지 못하는 목회자들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는 안된다.

종교 지도자들은 다른 어떤 분야의 지도자들 보다도 더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종교 지도자들이 다른 분야의 지도자들에 비하여 조금이라도 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가? 다른 종교 지도자들에 관하여는 내가 잘 알지 못하겠으나, 내가 속하여 있는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의 모습 속에서 존경과 신뢰를 발견할 수 있을까?

언론 매체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유명 목사들의 파렴치한 행위들… 횡령 배임 간음 등의 죄를 범하고서도 버젓이 강단을 지키고 있는 목회자들, 그런 부류의 목회자들의 설교를 전파에 띄워 보내는 기독교 언론들, 그런 목회자들을 초청하여 부흥 집회를 갖는 또 다른 목회자들, 초록은 동색이라고 그들을 비호하기에 급급한 동료 목회자들… 잘못되어 있어도 보통 잘못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 그 뿐인가? 목회자들의 비행을 탓하는 평신도들을 향하여 “고발을 하겠다”느니 “그렇게 떠들어 대니 전도가 안된다”고 말하는 목회자들… 그런 사람들은 모두 ‘내려와야 할’ 사람들이다. 내려와야 할 사람이 스스로 내려 오지 않으면, 끌려 내려지게 된다. 신뢰 받지 못하고, 존경 받지 못하는 지도자는 즉시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한다. 그 길만이 본인도 살고 구성원도 사는 길이다.

* 뉴욕한국일보 2007년 5월 22일(화요일)자 A10면 발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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