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배경 .영향 . 현대적 의의

한가람 0 7,104 2007.01.22 17:28
전도와 선교 활성화·교육기관 설립,  인권 신장·애국운동 밑거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영향과 현대적 의의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인수 교수(장신대)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영향 그리고 그 현대적 의의’를 일부 발췌, 소개한다.

선교는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한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데에서 비롯된다. 성령의 역사는 주로 부흥운동에서 시작됐다.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우리 나라는 시해사건, 을사늑약, 통감부 설치, 정미7조약에 의한 경찰과 군대의 해산, 고종황제 강제 퇴임 등 일제의 침탈 과정을 겪었다. 흉년과 기근, 역병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황폐해졌다. 

1903년 함경남도 원산 지방을 방문한 남감리회 중국 선교회 소속 화이트(Mary C. White)와 캐나다 장로회 소속의 다른 여선교사 두 사람은 현지에서 선교하고 있던 캐나다선교회 소속의 맥컬리(Louise H McCully) 선교사와 함께 선교사들의 영성강화를 위해 합심기도를 했다. 

이 특별기도 주간에 초청된 하디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와 한국교인들 앞에 자신의 교만함과 신앙 없음을 자백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하디의 자백과 성령의 충만을 목도하고 그들도 동일하게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다. 1903년 원산에서 하디 선교사의 참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되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인 길선주 장로는 1906년부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친구 박치록 장로와 함께 새벽기도에 힘썼다.

이듬해 1907년 1월 2일부터 장로회 사경회가 시작되어 낮에는 900여 명의 남자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1,500여 명의 남자들이 모여 전도집회를 했다. 게속 새벽기도와 말씀훈련이 이어지면서 1907년 1월 14일 본격적인 부흥운동이 촉발하였다.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 개인과 사회의 회개로 도덕성이 회복되었다. 부흥이 일어나기 전 한국교인들은 참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참회는 기독교인의 첫 단계다.

부흥의 물결은 다음 달 2월, 학교가 개학을 하면서 여러 학교로 확산되었다. 초등학생들까지도 부흥운동에 동참하여 은혜를 받았다. 교인들의 회개 경험은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으로 정착하는 중대한 첫 걸음이 되었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며 주일에는 불신자도 가게문을 열지 못할 만큼 변모한다.

둘째, 전도와 선교운동 및 교육기관의 확장이 온다. 참회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복음증거를 담대히 하여 교회성장을 가져왔다. 1907년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 수가 3,000명이 넘었다. 장로교회는 약 34%, 감리교회는 118%가 증가하였다.

또한 기독교학교 설립도 촉진시켰다. 1906년은 208개 학교가 있었지만 1907년은 무려 130개 이상의 학교가 개교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은 장차 일어날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셋째, 인권 신장이다. 부흥운동 결과 전통문화를 변혁하여 신분제도의 붕괴, 노비해방, 남존여비 사상이 무너졌다. 천민으로 박해받던 숯장수, 광대, 무당, 백정 등을 인간으로 선언하고 교인으로 인정했다.

넷째, 연합운동의 활성화다. 한국교회는 1907년 대부흥운동을 전후하여 성서공회, 대한성교서회 설립과 잡지, 신문, 찬송가 발행의 합동이 이루어져 연합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 연합은 교육기관들의 연합으로도 이어졌다.

다섯째, 애국운동을 들 수 있다. 애국은 기독교 신앙과 깊은 연결이 있다. 부흥운동의 중심에 있던 길선주 장로는 나라사랑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직접 참가하여 3·1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서명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 인으로 목사가 13명이나 됐다. 일제 앞장이 스티븐슨을 격살한 장인환 의사, 매국노 이완용을 습격한 이재명 의사도 기독교 신자였다.

한편 국채보상운동, 전국의 여성들이 반지를 빼서 바쳐 국채를 갚자는 탈환회(脫環會) 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은 교회와 교인들이 주도한 애국운동이었다. 이 모든 운동의 저변에는 부흥운동에서 고취된 애국사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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